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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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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산면(聖山面) [면]

    성산면

    본래 임피군의 지역으로서 임피 읍내 북쪽이 되므로 북일면이라 하여 거척, 내정, 사옥, 내흥, 중흥, 석포, 성동, 요동, 상흥, 둔덕, 만동, 구이, 고봉, 식천, 마동, 도암의 1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상북면의 남전, 동요, 여방, 기린, 옥곡, 우곡, 신기, 창동, 중오, 상작, 하작, 상동, 예점, 구억의 14개 동리와 남산면의 덕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성산의 이름을 따서 성산면이라 하여 옥구군에 편입되어 내흥, 덕성, 둔덕, 고봉, 도암, 여방, 대명, 창오, 산곡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내흥리가 군산시에 편입되어 현재 8개 리가 되었다. 동쪽은 나포면과 임피면, 남쪽은 대야면과 개정면, 서쪽은 군산시, 북쪽은 나포면과 금강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마서면에 닿아 있다.

  • 성덕리(聖德里)

    본래 임피군의 북일면 지역으로서 오성산(군산천) 밑이 되므로 성동 또는 성덕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편입에 따라 석포리, 요동리를 병합하여 성덕이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성덕리 성덕(聖德)
    마을의 형성연대는 조선시대 초기로 제주 고씨가 처음 정착하여 이루게 되었으며 선돌, 곧마동, 불무골, 붕어골, 대습골이라 불렸으나 오성산의 큰 덕을 본다는 것과 선돌골이 변하여 성덕이라 불린 마을이다. 주변에는 오성산과 금강이 흐르고 있고 옛날 오성산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을 입구에는 500여년 된 정자나무가 마을 역사를 알리듯 서있고 태학재라는 고개가 전설을 안은 채 남아 있다. 서해안 개발에 금강하굿둑이 준공됨으로서 충청도와 근거리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대로 지방발전과 본 마을에도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 믿어지는 곳이다.
    성덕리 항동(巷洞)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시대로 제주 고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오성산 밑에 성덕 북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달개, 구령목이라고 하였으며 충남 서천군에서 보면 오성산에서 떠오르는 달을 볼 때 공중에 하나 금강에 비친 달이 있어 명승지로 알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200여 미터 되는 돌재산과 금강이 흐르고 있으며 고양이골에 하부사라는 절터자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성덕리 요동(堯洞)
    마을 형성연대는 1600년전 경으로 평산 조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요골이라 불렀으며 성덕의 서남쪽에 돌산 밑에 있는 이 마을은 한봉산과 금강을 끼고 있어 원예업에도 종사하고 금강하굿둑 관광지에 한 몫을 할 곳이다. 전설로는 소가 쉬고 있다는 와우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가 없다.
    구렁독 [항동] [마을] 오성산 밑, 성덕 동북쪽에 있는 마을 구렁-재 [고개] 성덕에서 구렁목으로 가는 고개
    너벅-바우 [바위] 구렁목 북서쪽에 있는 넓은 바위 달-개1 [마을] 구렁목 남쪽에 있는 마을
    달-개2 [월포] [나루] 구렁목에서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고마리로 건너가는 나루터. 뒷산에서 달 뜨는 것이 보인다 함. 달개-뒷산 [월포산] [산] 달개 뒤쪽에 있는 산
    대수-골 [죽곡] [마을] 성덕 서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돌-산 [석산] [산] 성덕 서쪽에 있는 산
    뒷골-방죽 [후곡제] [못] 성덕 서쪽 뒤에 있는 못 뒷-두랭이 [들] 성덕 동쪽에 있는 들
    멍지-매[마을] 요골 북쪽에 있는 마을 멍지매-재 [고개] 멍지매에서 성덕으로 가는 고개
    새터-뜸 [마을] 성덕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서낭당-고개 [고개] 성덕에서 둔덕리 큰골로 가는 고개
    석산 [산] 돌산 성덕 [마을] 성덕리
    성덕-수리조함 [못] 성덕 동쪽에 있는 못 성동 [마을] 성덕리
    성산-리 [마을] 구렁목 동쪽에 있는 마을 성족-곡 [마을] 성족골
    성족-골 [성족곡] [마을] 멍지매 서북쪽에 있는 마을 승족골-재 [고개] 성족골에서 멍지매로 가는 고개
    안-뜸 [청량끝] [마을] 성덕 동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앞-들 [들] 성덕 서쪽에 있는 들
    요-골 [요동] [마을] 성덕 서남쪽, 돌산 밑에 있는 마을 요-동 [마을] 요골
    요동-방죽 [못] 요동 서쪽에 있는 못 요동-재 [고개] 성덕에서 요동으로 가는 고개
    월-포 [나루] 달개2 월포-천 [내] 항동방죽에서 금강으로 흐르는 내
    절-골 [골] 오성산 중턱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죽곡 [마을] 대수굴
    죽곡-제 [못] 대수굴 앞 동쪽에 있는 못 청량굴-샴 [우물] 청량끝 동쪽에 있는 샘
    청량-끝 [마을] 안뜸 택-재 [골] 옥녀봉(군 산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
    함봉-산 [산] 성덕 남쪽에 있는 산 항-동 [마을] 구렁목
    항동-방죽 [못] 항동 동남쪽에 있는 못 후곡-제 [못] 뒷골방죽
  • 둔덕리(屯德里)

    본래 임피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둔덕이 되었으므로 둔덕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흥리, 중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둔덕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둔덕리 상흥(上興)
    마을 형성 연대는 조선조 중엽으로 남원양씨가 처음 정착했던 곳으로 큰골이라고 불렀으며 또 웃멀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상흥이라 붙여졌다. 둔덕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오성산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대동천의 상류와 오성산 아래에 있다. 노거수로 300년 되는 팽나무가 지금도 옛모습을 갖추고 있다.
    둔덕리 대동(大同)
    마을 형성연대는 1600년 전으로 남원 양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흔옥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는 큰골, 큰마을 상흥이라 불렀으나 자연마을 분리 때 대동이라 칭하였다. 주위에는 도진산과 대동천이 흐르고 성흥사라는 절이 있다.
    둔덕리 흔옥(欣玉)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조 중엽으로 평산 조씨, 평강 채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큰골이라 하였고 뒷산이 구슬과 같은 모양이라서 흔옥이라 하였다. 주변에는 규모산(구메산), 오랑캐산과 둔덕천이 흐르고 있다. 전설로는 왜목형이란 임진왜란시 왜적의 목을 쳤다는 고개가 있다. 또한 구메산 모퉁이는 가장사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초분으로 두었다가 육탈된 후 매장하는 풍습이 있어 이곳이 그 초분지역으로 이곳을 지나치기를 꺼려했다하나 지금은 도시화로 찾아볼 수 없다.
    둔덕리 둔덕(屯德)
    마을 형성연대는 1600년전으로 해주 오씨들이 처음 정착하였다. 둔덕이란 임진왜란시 의병이 이곳을 중심으로 병사가 모인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둔덕천과 운담봉이 금강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와 기싸움을 하던 기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으며 운담봉에서 추수감사와 행운도 빌었다고 한다. 특이한 사항은 둔덕개량조합을 만들어 일본 지주들의 착취와 학대에 대한 반항과 농산물 구판사업, 경로사상의 고취, 효행심의 앙양, 마을민의 근검정신 아양과 탈선행위의 방지 등 부촌을 이루는데 이바지하였다.
    둔덕리 중흥(中興)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조시대로 성주 이씨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처음은 마을이 논에 사는 게와 비슷하다 하여 해(蟹)를 붙여 해형이라 하였으나 한말에 중옥리로, 일제강점기에 중흥이라 칭하였다. 소가 누운 것과 같다 하여 소누골이라 했으며 야트막한 산(50m)이 자리하고 있다.
    고양이-바우 [바위] 새박굴 북쪽에 있는 고양이처럼 생긴 바위 구석-멀 [마을] 새박굴 서쪽에 있는 마을
    넘-말 [마을] 큰골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골안-뜸 [마을] 동편 서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대-동 [마을] 큰골 동편1 [마을] 중흥
    동편2 [마을] 웃멀 동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둔덕 [마을] 둔덕리
    둔덕-들 [들] 둔덕 남쪽에 있는 들 뒷-골 [골] 웃멀 북쪽에 있는 골짜기
    모팅이 [마을] 흔옥 동쪽 모퉁이를 이루고 있는 마을 무제-봉 [산] 웃멀 동쪽에 있는 산. 기우제를 지냄.
    바오-굴 [마을] 웃멀 남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큰 바위가 하나 있음. 박문-들 [마을] 중흥 서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밀양 박씨, 남평 문씨가 살았음.
    상-흥 [마을] 웃멀 상흥-리 [마을] 웃멀
    상흥-제 [못] 웃멀방죽 새박-굴 [마을] 웃멀 남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서당-굴 [골] 진동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덕-굴 [마을] 중흥 서북쪽에 있는 마을
    서-편 [마을] 웃멀 서쪽이 되는 마을 오덕-사 [절] 오성산 남쪽 중턱에 있는 절
    웃-멀 [상흥, 상흥리] [마을] 둔덕 위쪽에 있는 마을. 오성산(군 산천) 서남쪽 기슭이 됨. 웃멀-방죽 [상흥제] [못] 웃멀 남쪽에 있는 못
    장-꾼이 [마을] 흔옥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중-흥 [동편, 해령] [마을] 둔덕 서북쪽에 있는 큰 마을
    진등-재 [고개] 큰골에서 웃멀로 넘어가는 고개. 긴 등성이로 되었음. 큰-골 [대등] [마을] 흔옥 동북쪽에 있는 마을
    큰-뜸1 [마을] 중흥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 큰-뜸2 [마을] 큰골 남쪽이 되는 큰 마을
    해령 [마을] 중흥 호랑이-바우 [바위] 바오굴 동쪽에 있는 바위. 호랑이처럼 생겼음.
    흔-옥 [마을] 둔덕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물이 좋다 함.    
  • 고봉리(高峰里)

    본래 임피군 북일면의 지역으로서 고봉산(군 산권) 밑이 되므로 고봉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등리, 구이리, 식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봉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고봉리 만줄(萬茁)
    마을 형성연대는 400년 전으로 평산 조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다. 옛날 강가의 갯벌에 줄포가 무성하여 만줄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주변에는 황새머리와 같다 하여 황두당과 둔덕천이 있다. 300년 되는 팽나무가 있으며 목마른 황새가 물을 쪼아 먹는 곳이라 하여 명당 찾는 사람들도 가끔 이곳을 찾는다.
    고봉리 고봉(高峰)
    마을 형성연대는 마한시대로 추측되며 심, 황, 채씨가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높은 산을 동편에 두고 그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높은 봉우리의 정기를 받은 마을이라 하여 고봉이라 불렸다. 주변에는 170m의 고봉산이 있으며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채오덕씨 집이 있다. 이곳은 옛날 지네터로 고봉산은 지네와 맥을 같이 하였다 하며 이집의 한가운데가 지네의 어금니라고 믿어왔다. 이 집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한 도승이 나타나 이곳은 지네의 모양이며 지네는 불빛을 싫어하니 그늘을 만들어주고 연못을 만들어서 지네를 잘 보호하라 하고는 사라졌는데 그 후 집 앞에 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어주었더니 집안이 흥했다고 한다.
    고봉리 성일(聖一)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조 중엽이며 평강 채씨가 정착한 것으로 안다. 명칭은 고산매 오양골(지형이 소오양간 같다고 해서)이라 이름하였고 그 후 점촌(옹기그릇 도요지)이라고도 하였다. 해동과 중앙마을을 합하여 성일마을로 불렀다. 이 이유는 성산면에서 중심지이며 일번지라는 뜻이다. 매화산에 명단 매화당이 있고 효자 가희대부 채동구의 효자각이 있다. 음 7월 15일 중원절 백중날에 술메기도 한다. 거리제, 용왕제, 조앙제의 풍습이 이다. 주변에는 매화산과 당그래산이 있으며 고봉천이 흐르고 있다. 민요로 상여소리(허야 허야 어나리 넘자 허오)가 내려오고 있다. "고상당을 이별하고서 영결동헌 나는 간다. 익산대는 어디두고 명전 공포가 앞을 섰다 허야 허야 어나 넘자 허오 간다고 설어워 말고 슬하자손 너희들 부디 부디 잘 살아라."라는 상여노래와 모심기 노래인 "어여 어여 상사뒤야 여봐라 농부야 말들어라. 아나 농부야 말들어라. 어여 어여 상사뒤야 피랭이 꼭지가 개화를 꽂고 매초라기 춤이나 추어보자."라는 노래가 곧잘 불러지고 있다.
    고봉리 만동(晩洞)
    마을 형성연대는 고려 말로 추정되며 최씨들이 처음 정착했다 하는데 그 전설로는 해변가에서 거주하던 박돌무치라는 사람이 선몽으로 해일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했다고도 한다. 처음은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을 가졌다 하여 고사매라고도 불렸다. 또 고사매의 끝마을 만동과 귀의 입구 마을인 구이마을을 합하여 1970년경 만동마을로 칭하게 되었다. 마을 주변에는 황산벌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는 황새 머리에 해당하는 명당 자리라함을 말하며 고봉천도 흐르고 있다.
    고-봉 [마을] 고봉리 고살-매 [매동] [마을] 고봉 북쪽에 있는 마을. 매화낙지형이라 함.
    곤자-굴 [골] 고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구렁-목1 [마을] 원고봉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구렁-목2 [마을] 매동 북쪽이 되는 마을 구렁목-고개 [마을] 고살매에서 외골로 가는 고개
    구-이 [마을] 귀리 귀-리 [구이] [마을] 고봉 서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잎사귀 같다 함.
    다리실-재 [월골재, 월곡치] [고개] 귀리에서 창오리 중오로 넘어가는 고개 당그래-산 [산] 점촌 동북쪽에 있는 산. 당그래(고무래) 같이 생겼다 함.
    둔덕-들 [들] 점촌 서쪽에 있는 들 만-동 [마을] 점촌 서쪽에 있는 마을. 늦게 생겼다 함.
    만-줄 [마을] 귀리 서쪽에 있는 마을. 줄이 많다 함 매-동 [마을] 고살매
    몽사-터 [마을] 원고봉 동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안-구실 [골] 만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 있음
    여무-굴 [골] 고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왜-골 [마을] 매동 동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원-고봉 [마을] 고봉리의 원 마을 월곡-재 [고개] 다리실재
    월곡-제 [못] 고봉 동쪽에 있는 못 월곡-치 [고개] 다리실재
    점-촌 [중앙] [마을] 고살매 서북쪽에 있는 마을. 면소재지로 면의 중심이 됨. 중앙 [마을] 점촌
    채-효자문 고봉에 있는 평강채씨의 효자문 청장-멀 [골] 고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황사멀-재 [산] 만동 서쪽에 있는 산. 산형이 황새 같다 함.    
  • 도암리(挑岩里)

    본래 임피군 북일면의 지역인데 도암 또는 도암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동리, 식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암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도암리 식천(食川)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시대로 한산 이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으며 밥내, 밥날 등으로 불렸다. 밥내, 밥날이란 살미산의 모양이 중이 밥을 얻으려는 형상과 같다하여 붙여졌다. 주변에는 살미재가 있다.
    도암리 창암(倉岩)
    마을 형성연대는 1400년 전으로 채씨들이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며 창갓(창고의 갓에 있는 마을)이라 불렀으며 푸른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창암이라 불렀다. 도암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이곳은 고려 때 진성창이 있었다고 하며 망경산과 창암연못이 있다. 그리고 400년 되는 느티나무가 서 있고 채일매라는 옛날 채일을 쳐놓고 활을 쏘았다는 곳이 있다.
    도암리 도암(挑岩)
    마을 형성연대는 이조시대로 평강 채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으며 도암이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나온 별천기 선경이란 곳에서 따와 붙여진 이름 같고 뒤쪽에는 옥여봉, 기린봉, 만경봉이 있고 앞에는 넓은 들판으로 살기 좋은 곳이다.
    도암리 마동(麻洞)
    형성연대는 500여 년 전 조선중기로 추정되며 평산 신씨가 정착하였고 마동 뒷산을 마초산이라 부르며 지형지세가 말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동이라 함은 일본인이 마(馬)자를 잘 모르고 마(麻)자를 붙여서 지금에 이르렀다. 한국 축구의 선구자 채금석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유적으로는 고인돌 4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약 500년 수령의 팽나무가 있어 매년 음 정월 4일에 고목제를 지낸다. 마을에 120년 전에 만든 큰기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마을 부녀자들이 정월 4일에 마을 앞에 있는 500년 되는 고목(팽나무)에서 고목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평화와 무운장수의 행운을 비는 제를 지낸다. 서쪽 도지산에 1910년까지 봉수대가 있었으며 승지골(승장골) 임진왜란시 이 지방우병들의 큰 승전지로 구전되고 있어 승지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명 마골이라고 한다. 또 말매라고도 불렀다.
    도암리 곡동(谷洞)
    마을 형성연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대이며 개성 김씨, 원주 원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았다. 환동, 고려터, 세곡, 가는골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환동은 고려의 충신들이 조선조 개국과 더불어 피난터라는 뜻이며 고리터는 고려터가 변하여 나온 말이라 붙여진 것 같으며 세곡은 골이 가늘고 깊어서 피난터요 외부에서 잘 안 보인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도암의 서남쪽에 가느다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문고리 같다고도 한다. 전설로는 왕골품이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비늘과 날개가 있어 역적이 아니면 왕좌를 넘볼 인물이라 하여 관가에서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평산 조씨, 남원 양씨의 효열각도 볼 수 있다.
    가는-골 [세곡] [마을] 도암 서북쪽 가느다란 골짜기에 있는 마을 고리-터 [환동] [마을] 도암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문고리와 같다 함
    고리터-재 [고개] 고리터에서 여방리 동은으로 가는 고개 고-안 [들] 마골 북쪽에 있는 들
    남생이-바우 [바위] 옹골 중간에 있는 바위. 모양이 남생이 같다 함 도-암 [마을] 도암리
    도암-골 [마을] 도암리 도암-치 [고개] 창암재
    도터-굴 [마을] 밥날 동쪽에 있는 마을 마-골 [마을] 마동
    마-동 [마골] [마을] 도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 모시 길삼을 많이 하였다 함. 마운-산 [산] 도암 동쪽에 있는 산
    밥-날 [밥내, 식천] [마을] 도암 남서쪽에 있는 마을. 앞으로 내가 흐름. 밥날-다리 [식천교] [다리] 밥날 서쪽에 있는 다리
    밥-내 [마을] 밥날 방죽-및 [들] 창암방죽 북서쪽에 있는 들
    봉우-재 [산] 고리터 북쪽에 있는 산. 전에 봉화를 올렸다 함. 뾰죽-산 [산] 고리터 동북쪽에 있는 산. 매우 뾰족하다 함.
    새-터 [마을] 창암 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서당-굴 [마을] 마골 동쪽에 있는 마을. 서당이 있었음.
    세-곡 [마을] 가는골 승지-골 [마을] 마골 북쪽에 있는 마을
    식-천 [다리] 밥날 식천-교 [다리] 밥날다리
    씨-아시 [마을] 창감 북서쪽에 있는 마을 열녀-문 [문] 도암리에 있는 열녀문
    옹지-짝 [마을] 창감 동쪽에 있는 마을 응-골 [골] 고리터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재공-굴 [골] 승지굴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아-막 [마을] 창감 서쪽에 있는 마을. 기와공장이 있었음.
    참새-모랭이 [모롱이] 밥날 서쪽에 있는 모롱이 창감 [마을] 도암 남동쪽에 있는 모롱이
    창감-재 [고개] 창암재 창검-방죽 [못] 창암방죽
    창-암 [마을] 도암 동남쪽에 있는 마을. 고려 시대에 진성창이 있었음. 창암-방죽 [창검방죽] [못] 창암 서쪽에 있는 못
    창암-재 [도암치, 창암치, 창감재] [고개] 창암에서 창오리 창안으로 가는 고개 창암-치 [고개] 창암재
    칠-거리 [마을] 창암 북동쪽에 있는 마을 환-동 [마을] 고리터
  • 여방리(余方里) [리]

    본래 임피군 상북면의 지역으로서 여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전리, 동요리, 기린리를 병합하여 여방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여방리 여방(余方)
    마을 형성연대는 임진왜란 시로 밀양 박씨들의 후손들이 피난지로 처음 정착하였으며 원여방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변에는 대명산이 있다.
    여방리 기린(麒麟)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중기로 남평 문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여 살았으며 문리동, 칠거리, 숫양골이라 불렸으며 문리동이란 문씨가 터를 잡은 곳이라는 뜻이며 칠거리는 교통의 중심지에서 나온 말이고 숫양골은 숫을 굽는 곳이란 뜻이다. 기린이란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기린의 모양과 같은 산이 있었다 하여 붙여졌다. 일명 방천매로도 불렸다. 여방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주변에 대명산과 기린일각이란 명당이 있었고 기린천이 흐르고 있다. 지석묘 3기가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기린일각에 묘를 쓰면 왕의 사위가 될 남아를 낳고 왕비가 되는 여식을 낳는다고 하였다 한다.
    여방리 남전(藍田)
    마을 형성연대는 1500년 전 경으로 선산 김씨들의 후손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남뱅이라 불러왔다. 남뱅이란 푸른 쪽빛의 물이 나온다는 밭이 있다 하여 붙여졌고 지금은 남전이라 부른다. 여방리 북서쪽이 있는 마을로 여방천 상류, 오성산 밑에 옛날 김삿갓이 자주 들렸다는 전설도 갖고 있다.
    여방리 수심(修心)
    마을 형성연대는 1500년 전으로 평산 조씨의 후손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그 후 신천 강씨들이 마을을 형성했다 한다. 수심이란 마음을 닦는다는 뜻으로 옛날에 이곳은 불자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남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가 좋아 수양차 오는 사람들이 많고 수심제가 있다. 1200년 전에는 마을 형성된 고분들도 많이 있다. 고분으로 석실과 일광사 그리고 옛 절터가 많으며 장구산이란 구전 전설이 다음과 같다. 오성산의 큰 줄기가 내려오다 장구 모양으로 멈추었고 많은 절이 세워져 불도들이 권력과 금력에만 탐을 내어 부처님의 노여움을 사자 한 노승이 이 산줄기를 끊으면 더욱 부자가 되고 권력이 생긴다 하여 산허리를 끊었더니 오히려 절이 망하고 화재가 나서 큰 화를 당했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당산제로는 뒤 큰골에서 매년 부녀자들이 산제를 모셨으며 소원성취를 빌었다고 한다. 군산에서는 가장 높은 오성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하며 고장 사람들이 일치 합심하여 생활하고 있다.
    여방리 동요(東堯)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중엽으로 원주 원씨들의 후손인이 경기도 이천에서 신천지 정착을 목적으로 남행하여 오성산 산세에 의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동요란 오성산의 산세가 동서로 줄기가 뻗어 동쪽은 동요, 서쪽은 요동이라 하였다. 도한 원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원씨만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전 서쪽에 인접해 있는 마을로 성덕과 요골의 동쪽에 있으며 주변에는 오성산과 금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300년쯤 되는 팽나무와 소나무가 마을을 수호하듯 서 있다. 민간신앙으로는 아낙네가 아침 일찍이 청수 한 그릇을 떠 놓고 기원하는 신앙이 있었다고 한다.
    기-린 [마을] 방천매 기린-제 [못] 기린 서쪽에 있는 못
    깃-다리 [다리] 여방 서쪽에 있는 다리 남-전 [마을] 여방 북서쪽에 있는 마을. 쪽이 잘 되어 남빛 물감으로 쓰였음.
    남전-들 [들] 남전 앞 동쪽에 있는 들 동-요 [원촌] [마을] 남전 서남쪽에 인접해 있는 마을. 성덕과 요골의 동쪽이 되며 원씨가 많이 살았다 함.
    동요-제 [못] 동요 남쪽에 있는 못 물탕-굴 [골] 수심 뒤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방천-매 [기린] [마을] 여방 남쪽에 있는 마을. 뒷산에 기린혈이 있었다 함. 수-심 [마을] 남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산수가 좋아 수양차 오는 사람이 많았음.
    수심-제 [못] 수심 동쪽에 있는 못 여-방 [마을] 여방리
    여방-천 [내] 기린에서 남전으로 흐르는 내 원-촌 [마을] 동요
    일광-사 [절] 수심 서쪽 오성산 남쪽 중턱에 있는 절. 동쪽으로 향해 있어 해 뜨는 것을 보기에 좋다 함. 절-골 [골] 오성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칠-거리 [마을] 기린 서쪽에 있는 마을 팟작-굴 [골] 수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대명리(大明里) [리]

    본래 임피군 상북면의 지역인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곡리, 우곡리, 신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명산의 이름을 따서 대명리라 하여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대명리 대명(大明)
    마을 형성연대는 약 400여 년 전으로 우주 황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했다. 옥과 같다하여 옥실, 옥곡이라 불렀고 마을 주변에 있는 산이 그 형세가 이무기 같다하여 대이무기, 큰이무기로 불렀으나 그후 대명으로 개칭되었다. 약 400여 년 전에 축조된 옥곡제가 있고 옛날 왕에게 진상했던 돗자리(숫골 돗자리)가 유명하다. 옛날에는 대명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6․25 때 전소되었다. 마을에는 5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있고 물이 서출동류하여 마을이 조용하고 인심 좋고 인물이 많이 난다고도 한다. 민담으로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나누어 먹고 얼씨고 재미나는 옥실 옥실"하는 가사말의 노래도 있었다.
    대명리 우곡(牛谷)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 시대 초기로 알려지며 밀양박씨의 후손들이 정착하였다. 쇠실이라고 불렀으나 소의 형상을 닮은 곳이라 하여 우곡이라 부른다. 옥실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쇠매산이 있고 옥곡제도 있다. 특산물로 완초(돗자리 재료)를 가꾸며 한천이라는 곳은 항시 찬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대명리에 속했었고 찬샘골이라고도 불렀다.
    가장-골 [골] 옥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록-골 [골] 쇠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군부-터 [산] 쇠실 동쪽에 있는 산. 왜군 고사포가 장치됐었음. 대명사-터 [터] 쇠실 서쪽, 대명산 중턱에 있는 절터
    대명-재 [고개] 옥실에서 여방리 기진으로 가는 고개 들건너-뜸 [마을] 쇠실 동쪽에 있는 마을
    등내-들 [들] 옥실 동쪽에 있는 들 등내-천 [내] 상림골에서 살구정이로 흐르는 내
    모기장-뜸 [마을] 중뜸 동쪽에 있는 마을. 마목장이 있음. 방죽-안 [골] 옥곡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배양-굴 [마을] 살구정이 서쪽에 있는 마을 살구-정이 [행정, 향정] [마을] 옥실 서쪽 대명산 너머에 있는 마을. 살구나무 정자가 있었음.
    상림-골1 [마을] 옥실 남쪽에 있는 마을 상림-골2 [골] 상림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상림-산 [산] 옥실 서쪽에 있는 산. 상명당이 있음. 상림-제 [못] 옥실 남쪽에 있는 못
    새터-굴 [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쇠-실 [우곡] [마을] 옥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소의 모양이라 함.
    수박-재 [고개] 참새골에서 쇠실로 가는 고개. 수박 명당이 있다 함 숫곡-들 [고개] 등내들 동쪽에 있는 들
    시양-산 [산] 쇠실 동쪽에 있는 산 신기-리 [마을] 살구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
    옥-곡 [마을] 옥실 옥곡-제 [못] 옥실 동쪽에 있는 못
    옥곡-지 [못] 참새골 방죽 옥-실 [옥곡] [마을] 대명리에서 으뜸가는 마을. 대명산 동쪽 기슭으로 바위가 옥과 같다 함.
    우-곡 [마을] 쇠실 자그내-고개 [고개] 옥실에서 쇠실로 가는 고개
    절-터 [마을] 옥실 북쪽에 있는 마을. 절이 있었다 함. 중-뜸 [마을] 쇠실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찬-샘 [우물] 참새골 남쪽에 있는 샘 찬샘-골 [한천] [마을] 살구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 찬샘이 있음.
    참새골-방죽 [옥곡지] [못] 참새골이 있는 못 창감-재 [고개] 쇠실에서 도암리 도암으로 가는 고개
    채일-산 [산] 쇠실 동쪽에 있는 산. 모양이 채일(차일) 같다 함. 청룡-산 [산] 쇠실 북쪽에 있는 산. 산형이 청룡 같다 함.
    평강채씨-묘 [묘] 상림산 남쪽 중턱에 있는 평강 채씨의 시조묘 한-천 [마을] 참새골
    행-정 [마을] 살구정이 향-정 [마을] 살구정이
  • 창오리(倉梧里) [리]

    본래 임피군 상북면의 지역으로서 행정구역 폐합으로 창동리, 중오리와 상작리, 하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창동과 중오의 이름을 따서 창오리라 하여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창오리 창안(倉雁)
    마을 형성연대는 고려 시대로 평강 채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조창이 있던 곳이라 하였고 산의 형국이 기러기 같다고 하연 그러실(그리실)이라 하였으며 조창과 기러기 안(雁)자를 합하여 창안이라 불렀다. 창동 북서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망경산과 창안방죽이 있으며 인삼도 재배하고 있다. 창내라고도 불렀다. 보성사라는 절도 있고 창안석불도 현존되어 있다. 이 석불은 조선 시대 불교를 탄압할 때 불상의 목을 쳤는데 목에서 피가 흘렀기 때문에 다시 목을 붙여 놓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현재 한 가정에 안장되어 있으나 그 조각 수법은 섬세하지 않다고 한다. 또 토성으로 창안산성도 있다.
    창오리 창오(倉梧)
    마을 형성연대는 1500여 년 전으로 안동 노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였다. 돼지우리 모양이라 하여 돈담, 성의 아래에 있다 하여 성밑, 오동나무가 많다하여 중오, 또 머구실이라 불리었으나 1970년 중오와 창오를 합하여 창오라 불리고 있다. 주변에는 망경산이 있고 중오에는 지석묘 2기가 남아 있으며 300여 년 된 버드나무가 늠름히 자리잡고 있다. 또 덜컥다리라는 이 다리는 창오초교에서 약 100m쯤 동쪽에 있는데 옛날 돌로 다리를 놓았는데 우마차가 지날 때마다 덜컥덜컥 소리가 나 붙여진 이름이다.
    창오리 상작(上鵲)
    마을 형성연대는 1500년 전으로 임씨와 밀양 박씨로 알려지고 있다. 까치의 머리와 같다 하여 깐치멀이라 하였으며 주변의 만금산에는 까치의 머리에 해당되는 명당도 있다고 한다. 창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 중심에는 정자가 있으며 효열비각(효자지각)이 있다.
    구석-뜸 [마을] 중오 서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그르-실 [마을] 창안 동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깐치-말 [상작] [마을] 창동 동쪽에 있는 마을 다리실-재 [고개] 고봉리의 다리실재
    덜컥-다리 [다리] 창동 동쪽에 있는 다리. 큰 돌로 되어 있어 덜컥덜컥 소리가 남. 덜걱다리-보 [보] 덜걱다리 서남쪽에 있는 보
    돈-담 [마을] 창오 남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뒷산이 돼지형이라 함. 동-문 [터] 창안 동쪽에 있는 문터
    뒷-들 [들] 창동 동쪽에 있는 들 마-산 [마을] 말매
    말-매 [마산] [마을] 창안 동쪽에 있는 마을 망경-사 [보성사] [절] 망경산에 있는 절
    머그-실 [중오] [마을] 창동 남서쪽에 있는 마을 보성-사 [절] 망경사
    부처-당이 [미륵] 창안 중간에 있는 미륵 사장-재 [고개] 사전재
    사전-재 [사장재] [고개] 창안에서 도암리 도암으로 가는 고개 상-작 [마을] 깐치말
    새장군-터 [골] 쇠장구리 새-터 [마을] 중오 동쪽에 새로 된 마을
    서-문 [터] 창안 서쪽에 있는 문터 성-뜰 [산] 창안 북동쪽에 있는 산
    성-밑 [마을] 창동 북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뒷산에 성이 있다 함 쇠-장구리 [새장군터] [골] 깐치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장군이라는 부자가 살았었음.
    앞-들 [들] 창동 남쪽에 있는 들 옹-샴 [우물] 동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샘
    자그내-고개 [고개] 창안에서 대명리 옥골로 가는 고개 장수-바우 [바위] 창안 북쪽에 있는 바위. 장수 나온 문이 있다 함.
    재-빼기 [마을] 창안 남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중-오 [마을] 머그실
    창감-재 [고개] 도암리의 창감재 창-내 [마을] 창안
    창-동 [마을] 창오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창고가 있었음. 창-안 [창내] [마을] 창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 도암리에 있는 창안의 안쪽이 됨.
    창안-방죽 [못] 창안 남쪽에 있는 못 호산-리 [마을] 깐치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
  • 산곡리(山谷里) [리]

    본래 임피군 상북면의 지역으로서 고봉산 밑 골짜기가 되므로 산골 또는 산곡이라 하며 또는 그릇점이 있으므로 점촌 또는 애점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동리, 하작리, 구익리, 상작리 일부와 남산면의 덕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곡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산곡리 산곡(山谷)
    마을 형성연대는 고려 시대 황씨가 거주했다 하나 불분명하고 조선조 초기 전주 이씨가 단종의 폐위에 통곡하여 이곳에 피신하여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내동, 상동, 웃골이라 불렀으며 그 후산의 골이 깊고 우아하며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산곡이라 불렀다. 즉 산곡, 상동을 합하여 불러진 마을이고 효행비각과 효열비각이 남아 있다.
    산곡리 산남(山南)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시대로 전주 이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산곡리의 남쪽에 위치했다 하여 산남이라 불렸다. 농촌의 아릿다움을 자랑하며 근면하게 생활하고 있다.
    산곡리 작촌(鵲村)
    마을 형성 연대는 조선시대로 밀양 박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산의 형상이 까치의 아랫부분과 같고 까치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하작이라 불렀으나 1960년 작촌으로 개칭되었다. 산곡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깐치멀이라고도 한다. 적벽돌을 굽는 곳도 많다. 수령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산곡리 구작
    마을 형성연대는 조선 시대로 밀양 박씨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구덕, 삼성이라 부르기도 했고 1970년에 구작이라 개칭되었다. 깐치멀의 동쪽에 있는 2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구-억 [구영리] [마을] 깐치멀 동쪽에 있는 마을 구엉-리 [마을] 구억
    깐치-멀 [안깐치멀, 작촌] [마을] 산곡 동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깐치(까치) 같이 생겼다 함. 다리실-재 [풍덕매] [고개] 상동에서 고봉리 다리실로 넘어가는 고개
    말-무덤 [마을] 점촌 남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 큰 무덤이 있음. 바깥-깐치멀 [외작] [마을] 구억 동쪽이 있는 마을. 깐치멀이 바깥쪽이 됨.
    방망치-재 [고개] 깐치멀에서 산남으로 가는 고개 산-곡 [마을] 산곡리
    산-골 [마을] 산곡리 산-남 [흘남] [마을] 산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남쪽을 향했다 함.
    삼-거리 [길] 산곡에 있는 세 갈래길 상-동 [마을] 웃골
    수른-평 [들] 바깥 깐치멀 동쪽에 있는 들 수른평-다리 [다리] 수른평 동쪽에 있는 다리
    수른평-보 [보] 수른평 동쪽에 있는 보 안-골 [마을] 점촌 북쪽에 있는 마을
    안-까치멀 [마을] 깐치멀 애-재 [고개] 산곡에서 개정면 아산리 아산으로 가는 고개
    애재-보 [못] 애재 밑 동쪽에 있는 못 애-점 [마을] 산곡리
    열녀-문 [문] 산곡리에 있는 열녀문 외-작 [마을] 바깥깐치멀
    웃-골 [상동] [마을] 산곡 동북쪽에 있는 마을 작-촌 [마을] 깐치멀
    점-촌 [마을] 산곡리 증보-들 [들] 바깥 깐치멀 동쪽에 있는 들
    풍덕-매 [고개] 다리실재 흘-남 [마을] 산남
  • 오성산

    오성산은 군산시의 상징이다. 오성산은 군산시 내흥동 사옥에서 시작해서 북동쪽으로 완만하게 올라가 성산면 도암리에 이르면서 그 너비도 퍼지고 높이 솟아 다섯 개의 높고 낮은 형제의 봉우리를 이루면서 최상봉인 오성산봉에 이르고 거기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져 서포에서 마무리 지은 산이다. 군산시 내흥동의 사옥은 패총지로 여기에서 이미 돌연장이 발견되어 선사시대에 사람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이 입증된 곳으로 얼마 전까지 옥구군의 행정구역이었다. 이것은 오성산 기슭에서 일찍이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로 중요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오성산의 연봉과 그 줄기는 금강에 바짝 몸을 대고 금강 줄기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다. 이 산 연봉 중 최상봉 오성산과 그 옆 봉화산이다. 봉화산은 옛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봉수대의 흔적 외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 요새였음을 말해준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성산이 임피현에 나타나 있고 산 아래에 서포가 표시돼 있는데 당시는 서지포라 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도 오성산으로 나타나 있다. 이같이 오성산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명산이다.

    오성산
    산 정상에 오르면 맨 먼저 금강의 중류와 하류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류 쪽으로는 나포의 원나포 옛 포구에 그 옆 공주산 더 올라 웅포까지 훤히 들어오고 그 옆에 넓게 그리고 태연하게 흐르는 강줄기가 한필의 무명 빛이다. 원래 탁한 강물이라 소설가 채만식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탁류에서 굳이 금강 중류 아래 탁함을 말한 바 있으나 이렇게 오성산에 올라 내려다보는 그 강빛은 그와 반대로 잘 표백한 무명빛으로 보인다. 또 이 강 충청남도 연안으로는 공덕산 장항 위의 화양에 이르는 한 길이의 둑이 풀에 덮인 채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가깝게 보인다. 눈을 잠시 하류쪽으로 돌리면 군산 월명공원의 일부로 포함된 점방산이 제일 높게 나타난다. 이 점방산은 천방산이라고도 하지만 옛 봉수대가 있던 산으로 오성산 연봉인 봉화산과 불길을 주고받던 곳이다. 그 아래 군산시가 그리고 항만이 여러 가지 시설물이 서로 엉킨 모습으로 보인다. 건너편 장항의 제련소 굴뚝이 유난히 높아 보인다. 예부터 서로 바라보고 서로 건너다니며 살던 이 지역 지금은 그 내왕의 횟수도 오고 가는 물자나 배도 많아진 금강 하류 군산과 장항 앞 강 여기에 서린 한도 많았으니 고려 말 조선왕조 때 왜구들이 자주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기도 한 곳이다. 화약과 화포 화통 등 화약무기들을 만들어 큰 공을 물려준 최무선 장군이 신무기로 왜구병선 오백 척을 단숨에 전멸시킨 대첩의 곳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이 호남들의 기름진 쌀을 실어 간 식민지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신라군과 연합해서 백제를 침공한 당군이 이 금강 하구를 타고 올라간 곳이다. 당시는 백강이라고 했다. 이 당군과 백제의 수군이 싸운 백촌강도 이 강인데 지금의 웅포 앞 강으로 보고 있다. 오성산은 이 역사의 사실을 능히 보아 온 산이다. 백제의 서울 부여로 진군하던 당나라 군사가 오성산 산정에 이르러 거기에서 놀던 다섯 노인에게 길을 물으니 그들은 백제인이라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당나라 군사의 한 장수가 이들의 목을 베었다는 오성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오성산 산정에서 서포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평평한 자리에 이 오성의 묘가 남아 있다. 눈길을 더 멀리 던지면 충남 서천이 들어오고 강의 남쪽 연안으로는 나포들 그 들과 이어진 성산들 그리고 옥산, 옥구, 미성들의 푸르름이 한도 끝도 없다. 들의 푸르름은 한없는 평화다. 평화를 갈고 평화를 거두어 살려는 인가가 들 가운데 혹은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였다. 산으로는 나포, 불지산, 어래산, 도청산, 성산의 고봉산, 망경산, 진성창이 있던 창안산, 옥산의 돛대산, 금성산, 멀리는 회현의 오봉산도 아물거리며 보인다. 더 멀리 만경강도 반짝거림으로 보이고 서해도 반짝거림으로 보인다.
    고리터
    오성산 기슭에는 여러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 중 고리터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대대로 김씨가 살고 있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인 왕씨 일가족이 개성에서 도망나와 여기에 숨어들어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왕씨 성을 감추기 위해 김씨로 고쳤다는 이야기다. 처음엔 고려 사람이므로 고려터 하던 것이 소리 끝이 변해 고리터라고 불리는 것이라 한다. 대체 이 마을에서는 고리를 만들어 산 일이 없고 고리를 만들 만한 여건도 못되는 것으로 보아 허황된 추측만은 아닌 것 같다.
    지네터
    이야기는 이뿐 아니다. 고봉리의 지네터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다. 고봉리의 지네터란 이 마을 채원병의 집터를 말한다. 이 집터 뒷산 고봉산은 그 한 맥이 지네와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이 혈맥은 채씨 집터로 흘러 이 집 한가운데가 지네의 어금니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어느 날 한 도승이 이 집터를 잡아주면서 이곳이 지네모양으로 되었으며 지네는 불빛을 만나면 움직이지 않는바 오성산을 안산하여 집안이 크게 일어나고 오래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리라고 하였다. 그는 또 지네는 숲에서 사는 생물이므로 항상 그늘을 만들어주어야 하니 집안에 나무를 많이 심어 그늘지게 하라고 권했고 이 집 대문채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네가 목이 마르지 않게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도승은 오성산 봉화에 불이 있으니 이 집안은 계속 흥할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봉화대가 폐지되면 가세가 기울 것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당부까지 했다. 이에 채씨 일가는 도승이 말한 대로 봉화대가 있을 때는 집안이 계속 번창하여 멀리 중국까지 알려져 부를 누렸으나 봉화대가 없어진 후부터 이상하게도 가세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오성산과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 할 수 있다. 꼭 이것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인데 오성산이 그만치 알려진 명산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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